경주기행 (복수극, 모성, 연기앙상블)



복수극이라고 해서 통쾌한 카타르시스만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말을 잃어본 적 있으십니까. 저는 <경주기행>이 딱 그랬습니다. 단체 티셔츠를 맞춰 입은 네 모녀가 봉고차에 범인을 싣고 경주로 향한다는 시놉시스만 봤을 때는 요즘 유행하는 사이다 복수 오락영화를 떠올렸는데, 실제로는 전혀 달랐습니다.

복수극이라더니, 실제로는 다른 영화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복수를 소재로 한 장르 영화라고 하면 관객의 기대는 대체로 비슷합니다. 악당이 확실하게 응징받고, 피해자 가족은 눈물을 닦으며 속 시원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 저도 솔직히 그 기대를 품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흘러가면서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자꾸 꺾이는 게 느껴졌습니다.

피카레스크(picaresque)라는 장르 개념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주인공이 사회의 틈새를 헤집고 다니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방식인데, 악당이 서사를 주도한다기보다 선과 악의 경계가 뭉개진 인물들이 불완전하게 움직이는 이야기입니다. <경주기행>은 이 피카레스크 구조를 가족 복수극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냈습니다. 엄마 옥실과 세 딸이 꾸미는 복수 계획은 처음부터 삐그덕거리고, 허술한 부분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옵니다. 그 어설픔이 오히려 인물들을 더 실제 사람처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후반부에 옥실이 범인 백상현을 자기 허리에 칭칭 동여매고 산꼭대기로 기어올라가는 장면은 제가 올 한해 본 한국 영화 중에서 가장 강렬하게 뇌리에 박힌 숏 중 하나입니다. 통쾌하지 않았습니다. 그 몸짓은 분노보다 처절함에 가까웠고, 어딘가 종교적인 숙연함마저 감돌았습니다. 그 장면 하나로 영화 전체의 무게중심이 어디 있는지 짐작이 됐습니다.

모성이라는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것들

이 영화를 두고 모성과 가족애를 다룬 작품이라고 말하는 시각이 많습니다.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표현이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옥실이라는 인물은 단순히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이미지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막내딸과 남편을 잃은 슬픔을 8년 동안 복수심으로 버텨온 사람이면서, 동시에 살아 있는 세 딸에게 죄책감을 품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 인물 관계를 보면 이런 층위들이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1. 장녀 장주(공효진)는 복수 여행에 동참하면서도 자신의 남편과 딸이 걱정돼 내심 불안을 감추지 못합니다. 가족을 위해 엄마 편을 들면서도, 어느 순간 엄마에게 단호하게 할 말을 해야 하는 인물입니다.
  2. 차녀 영주(박소담)는 법대 출신으로 치밀한 알리바이를 설계하는 전략가이지만, 박소담 배우 본인이 "겉으로는 강단 있어 보이지만 사실 가장 겁 많은 캐릭터"로 해석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강한 척하는 여린 사람, 그게 영주입니다.
  3. 삼녀 동주(이연)는 프로레슬러 출신 다혈질 행동파인데, 모든 사건의 발단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믿으며 수시로 "미안해"를 되풀이합니다. 가장 강해 보이는 인물이 가장 무거운 죄책감을 지고 있다는 역설이 설득력 있게 작동합니다.

앙상블(ensembl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단독 주연이 아닌 여러 배우가 서로의 연기에 반응하며 전체적인 조화를 만들어내는 방식입니다. 이 영화의 네 배우가 만들어내는 앙상블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묘한 생활감을 풍깁니다. 세련되게 잘 짜인 스릴러라기보다는, 진짜 가족이 서로 부딪히고 엉키는 느낌이라는 게 맞겠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질감은 연출과 연기가 함께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절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영화에 대한 리뷰들 중에는 페미니즘적 연대나 여성주의적 구성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는데, 저는 그런 시각이 이 영화를 오히려 너무 깔끔하게 포장하는 것 같아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영화 속 여성들은 정교하게 설계된 연대를 실천하는 인물들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서로 부딪히는 불완전한 사람들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 날것의 질감을 이념적 프레임으로 정돈해버리면, 영화가 가진 진짜 결기가 희석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 검증해보니 소문 그대로였습니다

영화 개봉 전부터 캐스팅만으로도 화제가 됐습니다.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 이연. 김미조 감독이 GV에서 "이분들과 함께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고 했는데,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말이 과장이 아님을 납득하게 됩니다.

이정은 배우의 연기는 따로 설명하기가 오히려 어렵습니다.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눈빛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저는 그 표현을 이 배우한테 처음으로 진심으로 쓰고 싶었습니다. 캐릭터 심리 연구를 위해 감독과 함께 범죄 피해자 관련 자료들을 찾아봤다는 비하인드를 접하고 나니, 그 준비가 연기 안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다시 장면들이 떠올려졌습니다.

이연 배우의 경우, 프로레슬러 역할을 위해 10킬로그램을 찌우고 레슬링 기술을 오래 연마했다고 합니다. 체중 증량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닌데, 몸의 상태와 캐릭터의 핸디캡을 함께 고려해서 만들어낸 액션 장면들이 실제로 스크린에서 설득력 있게 작동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몸으로 연기한다는 표현이 이 배우한테 잘 어울렸습니다.

변요한이 연기한 백상현은 악역이지만 단순히 혐오스러운 방향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가 등장하는 장면마다 극의 흐름 자체가 바뀌는 게 느껴졌는데, 이건 배우의 존재감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캐스팅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더 궁금해졌습니다. 한국 독립영화 씬에서 이런 방식의 캐스팅이 가능하다는 것이 반가웠습니다. 씨네21에서도 변요한의 존재감에 대해 별도로 언급할 만큼, 이 캐릭터가 영화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분명했습니다.

한 가지 더 짚고 싶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장주의 딸 윤지, 즉 어린아이 캐릭터입니다. 이 아이는 가족여행에 따라가면서 어른들이 저지르는 일들을 목격하지만, 영화는 그 아이의 시선이나 이후 심리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 공백이 저는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리뷰들 대부분이 어머니나 세 딸, 혹은 범인에 집중하는 동안 이 아이의 상처 가능성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아쉬웠습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 즉 감정의 정화와 해소라는 측면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전하는 경험은 충분히 강렬합니다. 하지만 그 정화의 이면에 조용히 남겨진 것들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주기행>은 가볍게 보기에는 무게감이 꽤 있는 영화입니다. 그렇다고 무겁고 진지하게만 봐야 하는 영화도 아닙니다. 웃음과 숨막힘이 번갈아 오는 그 리듬이 이 영화만의 보법이고, 그게 제가 이 작품을 오래 기억하게 된 이유입니다. 복수극이라는 포장지에 기대어 보기 시작하되, 그 기대가 어느 순간 조용히 뒤집히는 경험을 하고 싶으신 분이라면 충분히 극장에 가볼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쿠팡플레이와 티빙 등 주요 스트리밍 플랫폼에서도 개별 구매로 볼 수 있으니, 극장을 놓친 분들도 선택지는 열려 있습니다.

--- 참고: 출처1: 나무위키 - 경주기행 출처2: 씨네21 - 경주기행 평론 및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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